◆《진상》③
〈총련고수투쟁에 바친 빛나는 삶, 강영관동지의 옥중투쟁-상-〉 총련조직을 지키기 위한 옥중결사전
총련중앙 상임위원인 강영관동지는 일본반동들이 총련탄압을 위해 날조한
《업무상횡령죄》라는 죄아닌 《죄》로 5년간의 옥고를 겪다가 지난해 12월 14일 새벽, 대동맥류파렬로 너무나도 애통하게 옥중순직하였다.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한생을 오직 총련의 애족애국위업을 위한 충성의 한길에 바쳤으며 일본반동들의 파쑈적탄압만행에 불굴의 신념과 투지로 맞서 조국을 옹위하고 총련조직을 고수하며 총련일군의 존엄을 지켜 완강하게 싸우다가 옥중에서 희생된 강영관동지에게 공화국공민의 최고영예인 로력영웅칭호를 안겨주시였다.
력사는 격동기마다 나라와 민족, 시대의 절박한 요구를 받아안고 한몸바쳐 위훈을 세운 영웅들을 기록하고있다.
강영관동지는 총련일군이 누구나가 그러하듯이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일본에 건너온 가정에서 나서자라 우리곁에서 함께 살며 일해온 평범하고 친근한 벗이였다.
그러한 그는 청춘시절부터 한생끝날까지 김일성주석님과 김정일장군님께서 이끄시는 력사가 낳은 항일의 영웅들과 조선전쟁의 영웅들, 강성대국건설과 조국통일의 영웅들을 따라배웠다.
그리하여 총련이 엄혹한 시련을 뚫고 새 시대, 새 단계를 창조해나가야 할 격동의 시기에 우리의 곁 가까이에서 총련일군은 어떻게 살며 투쟁해야 하는가를 빛나는 삶으로 보여주고 갔다.
강영관동지, 그는 어떤 신념과 생의 좌우명을 안고 살며 투쟁하였기에 총련과 애족애국운동의 력사와 더불어 영생하는 고귀한 영웅칭호를 지닐수 있었는가. 영웅의 빛나는 삶을 3번에 걸쳐 련재한다.
부당체포의 정치적기도
총련중앙 재정국장으로 사업하던 강영관동지는 1999년 11월부터
해리성대동맥류(解離性大動脈瘤)로 인한 심장병악화와 무릎관절염으로 도꾜의 수루가다이니찌다이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있었다.
일본치안당국은 이러한 강영관동지를 2001년 11월 28일 그 무슨
《업무상횡령죄》용의로 병원의사들의 항의마저 무시하고 병원침대우에서 체포련행하여 구금하는 만행을 감행해나섰다.
일본반동들이 강영관동지에게 들씌운 《업무상횡령죄》는 총련조직을 탄압하는 구실을 꾸며내기 위한 날조물이였다.
강영관동지를 《죄인》으로 만듦으로써 총련조직, 특히 총련중앙의 영상을 흐리게 하고 동포들을 리탈시키며 일본사회에서도 배척, 고립시켜 총련조직을 약화시키자는것, 나아가 탄압파괴하려는것이 일본반동들의 흉악한 기도였다.
이를 추구하는 구실을 찾아내기 위하여 일본수사당국은 당시 파탄된 조은문제 특히는 조은도꾜내부에 대한 일대 수색놀음에 혈안이 되여 날뛰였다.
일본금융경제범수사력사에서 일찌기 없었던 대대적인 수색과 수많은 관계자들에 대한 사정청취소동에서 수사당국이 노린것은 오직 한가지뿐이였다.
그것은 조은도꾜에서 《仮名口座》를 개설하여 관리리용해온것을
《업무상횡령죄》로 사건화하고 이것을 총련조직 특히는 총련중앙과 결부시킬수 있는 그 어떤 《증언》과 《증거》를 얻어내는것이였다.
강영관동지도 병원에서 사정청취를 당하였다.
그는 그 존재조차 몰랐던 조은도꾜의 《가명구좌》를 자기에게 결부시키려는 흉책이 바로 총련중앙을 탄압하려는데 있다는것을 처음부터 꿰뚫어보고 그 무슨 《용의》를 단호하게 부정하고 총련중앙을 철저히 지켜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수사당국은 란폭하게도 강영관동지를
《업무상횡령죄》용의로 11월 28일에 체포감금하였으며 다음날 11월 29일에는 검찰, 경찰 300여명을 동원하여 총련중앙의 재정국방을 강제수색하는 망동을 부린것이다.
하지만 이 수색은 그 어떤 물적증거물도 찾아낼수 없었고 속이 거의 빈 지함 몇개를 들고 철수하는 추태로 끝났던것이다.
그러나 일본수사당국은 횡포무도하게도 ①조은도꾜는 업무상횡령죄행위를
강영관동지의 지시에 따라 진행하였고 ②횡령금이 입금되는 《가명구좌》를
강영관동지가 개설하고 마음대로 관리하고있었으며 ③《가명구좌》의 돈을
강영관동지의 지시에 따라 총련에 넘기고있었다는 《검사조서》를 날조해내고
강영관동지를 끝내 기소하였다.
백일하에 드러난 진상
총련중앙에 대한 강제수색이 감행된 후 수사당국의 정치적목적이 무엇인가를 똑똑히 본 조은리사장들은 격분하여 검찰관들과 공판장에서 《검사조서》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전면부정하고 강영관동지가 이번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것을 증언해나섰다.
변호단측 증인들만아니라 지어 검사측의 증인들까지도 《검사조서》의 내용을 부정하고 강영관동지는 그 《仮名口座》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증언하였다.
일본수사당국이 강영관동지를 체포, 구속, 기소하며 유죄로 몰아넣기 위한 수사과정이 얼마나 란폭하고 진실을 짓밟은것이였는가는 다음의 사실이 명백히 증명해준다.
수사당국이 ①체포시에 언론보도들에 알릴 때에는 《강영관이 개설, 관리하던 仮名口座》라고 되여있던것이 ②구류장에서는 강영관동지가 아니라 《仮名口座를 영업부가 개설》이라는 표현으로 변경하였고 ③기소장에서는 《피고인들이 관리하던 口座》라는 추상적인 기재로 바꾸어놓은 사실이다.
강영관동지의 주임변호사는 수사당국의 이러한 수작을 지탄해나섰다.
《강영관씨를 기소하기 직전에 경시청은 명백히 립건에 대한 자신을 잃고있었다. 언론매체들도 강영관씨의 기소는 어렵다는 인상을 가지고있었다. 왜냐하면 그 시점에서 도꾜지방검찰청이 만들어낸 강영관씨의 통장보관설은 붕괴되여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 총련에 대한 편견과 정치적기도밑에 조선회관을 수색한 검찰당국은 자기 체면을 걸고 기소할것을 고집하면서 문제로 되던 통장이 실지로 보관되지 않았는데 실질적으로 관리하고있던것은 강영관씨였다는 허구의 사실을 꾸며내고 기소를 강행하였다.》
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도꾜지방재판소는 검찰당국의 이 란폭한 허위조서와 주장에 따라 2002년 2월부터 2004년 3월까지 30차에 걸쳐 부당한 정치공판을 벌렸다.
강영관동지는 모든 공판에서 《나는 무죄이다. 공소사실에 서술된바와 같은 사실은 나와 관련해서는 일체 없다. 다른 사람과 공모하였다는것만이 검찰관의 론거인데 공모한 사실도 물론 없다. 본래 나는 仮名口座의 존재조차 몰랐다. 만약 내가 이 사건에 관여했다면 그를 립증하는 령수증, 입출금전표 등 객관적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검찰측은 아무런 증거도 내놓지 못하고있다.》며 자기를 체포, 기소한것은 일본에 있어서 공화국의 대사관격인 총련을 강제수색하는데 목적을 둔 정치탄압이라고 치솟는 분노로 단죄하였다.
도꾜지방재판소는 재판의 전과정이 강영관동지의 완전무죄를 확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 무시하고 2004년 3월 26일 그에게 6년징역이라는 용납 못할 정치판결을 내렸다.
도꾜지방재판소만이 아니라 고등재판소(2005년 10월 6일판결),
최고재판소(2006년 9월 20일판결)도 공판과정에서 일관된 무죄증언들에는 일체 눈을 감고 지방재판소의 판결을 천만부당하게 지지하는 폭거를 감행하였다.
너무나 포악한 처사에 변호단은 《이 판결은 반공화국, 반총련책동을 조장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밑에 조은문제를 구실삼아 총련을 파괴할것을 목적으로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도저히 참을수 없는 정치탄압이며 공판에서 진행된 증인들의 진술을 완전히 무시한 근대형사재판의 대원칙인 증거재판주의에 어긋나는 위헌, 위법의 판결이다.》고 사법당국을 규탄하였던것이다.
〈총련고수투쟁에 바친 빛나는 삶, 강영관동지의 옥중투쟁-중-〉 정신육체적고통을 이겨가며
23번에 걸친 보석청구
강영관동지는 최고재판소의 판결후에 시즈오까형무소로 이송된 2006년 11월 9일까지의 5년간 도꾜구치소에서 옥중투쟁을 벌렸다.
창문도 없는 구치소독방에서의 5년간은 검찰과 법정에서의 날카로운 대결기간인 동시에 악화에로만 치닫는 심장병과 다리병의 육체적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간고한 나날이였다.
무릎을 수술하여 넣은 세멘트비스인 인공관절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고 심장병의 악화로 가슴이 자꾸만 높뛰여 숨이 가파로워지는것을 억제할수 없었다.
2001년 12월에 첫번째로 병치료를 위한 보석청구를 한 이후 그가 낸 청구는 23번이나 된다.
지방재판소는 그중 9번은 마지 못해서 보석결정을 하였지만 고등재판소는 그 보석결정도 인정하지 않고 그에 대한 항고도 기각하였다.
이에 분격한 변호단이 수십번에 걸치는 강력한 요구로 2003년 10월 9일, 1년 3개월만에 처음으로 정형외과의사의 진단을 받게 되였다.
그의 옥중생활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오른쪽무릎의 긴급수술의 필요성이 판명. 이대로 방치하면 보행불능으로 될것임, 최악의 경우 우하지의 무릎아래절단.》
그러나 일본사법당국은 심장병을 앓고 걷지도 못하는 그에 대하여 《증거인멸》이나 《도망의 우려》가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구실을 세워 끝내 단 한번의 보석도, 병치료를 위한 응당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생명의 안전을 잔인하게 유린하였다.
강영관동지는 결국 생의 마지막날까지 5년간 감옥의 벽밖으로는 나가보지도, 한번의 의사치료도 받지 못하였다.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외부병원에서 진찰을 받은것은 시즈오까형무소에 이송된 후인 2006년 11월 20일 시즈오까적십자병원에서였다.
이날의 진찰결과 CT사진에는 대동맥류가 직경 8㎝까지 확대되고있었다. 보통사람의 대동맥은 직경 약 4㎝이며 6㎝까지 확대되면 파렬될 가능성이 있는것이다. 대책은 수술뿐이였다.
의사는 이 진단이 의미하는 생명의 위험에 대하여 본인에게도 가족에게도 알려야 하였고 사법당국과 형무소에서 긴급치료대책을 세워야 하였을것이였다.
그러나 병원도 사법당국과 형무소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강영관동지의 이날 11월 30일의 옥중일기에는 동맥류진단을 받았는데 12월 25일에 재진단이 있게 된다고만 적혀있다.
12월 4일에 면회를 온 녀동생에게는 적십자병원에서의 진단을 받은데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고 자기는 걱정말고 가정을 잘 돌보아달라고 당부하여 밝은 얼굴로 바래주었다.
한 일군이 12월 12일에 받은 편지에서 그는 자기 건강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최고재판소판결은 받았어도 무죄쟁취의 그날, 그 순간까지 싸우겠다고 썼다.
강영관동지는 최고재판소의 판결후에도 이처럼 위태로운 병상황하에서도 무죄승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하였으며 11월 30일에는 법무대신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 항소편지에서 사실무근거한 《업무상횡령죄》를 들씌운 체포-기소-공판-판결의 전과정이 얼마나 부당한것이였는가를 사리정연하게 철저히 발가낸 끝에 다음과 같이 썼다.
《법치국가를 자부하고 증거재판주의를 대원칙으로 한다는 일본에서 무원칙, 무법이 횡행하는 사태가 일어나고있는것이다.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고있는 무고의 사람이 어느 하나 신빙성도 없는 재판에 걸려 유죄로 처해지고있는것이다.
검찰측이 유일한 증거라고 하여 제출된것은 허위라고 판명된 공술조서, 검찰측이 의도적으로 조작, 변조, 날조한 공술조서뿐이다.진실을 웨치는 증인들의 증언은 일고도 해주지 않았다. 정의의 성새라고 자부하는 최고재판소도 하급심의 사실오인은 상고리유로는 안된다고 하급심의 오유, 부정의의 판결을 시인하는 결정을 내린것이다.
나는 이상의 사태를 시정하는것은 일본국의 사법의 총본산인 법무성이며 그 책임자인 법무대신의 책무의 범주에 속하는것이라고 확신하여 직접 서면으로 호소하는바이다.》
장렬한 옥중순직
총련조직을 지키기 위한 불굴의 투쟁을 벌려나가는 강영관동지의 생명의 마지막순간은 사법당국과 형무소, 병원의 용납할수 없는 처사로 너무나도 빨리 엄습하였다.
12월 14일 아침, 형무소에서 날아온 청천벽력과도 같은 비보에 걷잡을수 없는 놀라움과 커다란 슬픔에 휩싸여 달려간 가족과 총련중앙일군들에게 형무소관계자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말하였다.
그날 새벽 3시경 간수의 감방순회시에 강영관동지는 눕지 않고 침대우에 앉아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고있는 모양이였다.
그런데 다음 순회시에는 침대우에서 머리를 푹 숙이고 어깨가 왼쪽으로 기울어진 이상한 상태였기때문에 3시 40분경 구급차로 시즈오까적십사병원에 급송하였다.
병원측에 의하면 그의 심장은 이미 멎었었고 소생조치도 그의 심장을 되살리지 못했다.
원인은 《해리성대동맥류파렬》이였다.
의사는 직경 8㎝로 확장된 대동맥류가 파렬되는 충격은 매우 클것이며 심장은 그 순간에 멎었을것이라고 하였다.
이 비통한 사실을 가족도 우리도 도저히 믿을수가 없었고 가슴미여지는 통분을 참을수 없었다.
일본반동들의 반조선, 반총련소동이 험악한 때에 옥에 갇혀 총련일군들과 어깨를 겯고 싸우지 못하는것이 뼈에 사무치게 분하다고 늘 말하던 강영관동지였다.
끝까지 투쟁하여 기어이 무죄석방을 쟁취하는것이 총련조직을 지키는 자신의 옥중투쟁과업이라 하여 불굴의 투쟁을 벌려온 투사가 독방의 침대우에서 깊은 생각에 잠기였다가 이렇게 앉은채로 그 누구도 지켜보는이 없이 숨을 거두고말았으니 이 애통함은 무엇에 비길수 있겠는가.
그가 앓고있는 병환이 얼마나 위태로운것이였고 치료가 얼마나 절박했는가를 사법당국과 형무소, 병원은 알고있었다.
모르는것은 본인이였고 가족들이였으며 우리들만이였다.
5년간에 무려 23번이나 병치료를 위한 보석청구를 일체 거절하고 그토록 위독한 병환을 방치하여 강영관동지의 귀중한 목숨을 옥중에서 잃게 한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 폭거가 또 어디에 있는가.
이른 새벽 사랑하는 부인,아들딸, 손자들과 친근했던 일군들의 목소리 한번 듣지도 못하고, 가족들에게 유언 한마디 전하지 못한채 단 홀로 감옥에서 희생된 강영관동지.
우리는 귀중한 동지의 생명을 옥중에서 잃게 한 일본사법당국의 잔학무도한 만행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것이다.
〈총련고수투쟁에 바친 빛나는 삶, 강영관동지의 옥중투쟁-하-〉 고결한 삶의 정신세계
유품들은 말해준다
강영관동지는 출옥후 투쟁에 필요하기때문에 소중히 보관해달라고 가족들에게 도서, 학습기록, 편지, 재판기록 등 유품들을 남겼다.
그는 11월 9일 시즈오까형무소에 이송된 후 면회하러 온 한 일군에게 말하였다.
《여기에 오니 앞으로 싸울 결심과 투지가 더 강하게 솟아오른다. 고수게구치소독방에는 창문이 없었소. 일과에는 바깥운동도 없었고 24시간 4면이 콩크리트벽인 독방에 갇힌채 식사도 위생처리도 해야만 했소. 그런데 여기는 비록 형무소독방이지만 창문이 있고 하늘을 볼수 있다. 운동시간에 해빛도 쪼이고 공부도 더 잘할수 있을것 같소.》
강영관동지가 남긴 유품들은 구치소독방에서 강요당한 정신적고통과 생명을 위협하는 육체적고통을 이겨낸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이야기해준다.
2004년 3월 도꾜지방재판소의 부당한 판결을 받은 날 쓴 편지가 남아있다.
《놈들이 아무리 공화국과 총련을 탄압하려고 〈죄없는 죄〉를 날조하여도 그것은 태양빛을 손바닥으로 가리워보려는 어리석은 수작입니다.궁국에는 반드시 정의와 진실이 이깁니다.차거운 구치소방안에도 이제 3년째 4월의 따스한 정기가 봄기운을 날라다주고있습니다.뜻깊은 4월의 봄날을 맞고보니 어버이수령님과 우리 장군님의 자애로운 영상이 자꾸만 떠올라 눈굽이 젖어오릅니다. 조국의 품과 지난 40여년동안 함께 땀흘려온 동지들이 무척 그리워 조선회관으로 달려가고싶습니다.》
수령님과 장군님의 뜻을 심장에 새기는것을 하루생활의 첫 일과로 삼은 그는 어버이수령님의 로작과 위대한 장군님의 말씀집을 펼쳐들고 읽었다.
편지지를 학습장으로 하여 교시,말씀들을 옮겨쓰고 중요한 대목에 밑줄을 그어놓은 매수는 2백수십장이나 된다.
그에게 애국의 신념과 강의한 의지를 다져준것에는 《태양찬가》, 《강계정신》, 《총대》를 비롯한 20권의 혁명소설책들과 《지리산의 갈범》 등 비전향장기수들의 15권의 실기와 시집들이 있었고 정신적량식으로 삼을 구절들을 옮겨쓴 편지지는 100장을 넘는다.
비전향장기수들의 시집 《태양과 신념》에서 다음 시구절은 강영관동지가 옮겨쓰면서 잠긴 심정을 알려준다.
해빛 한점 없는 곳
고독과 번뇌가
칠칠 드리운 독감방에서
마음속에 심장속에
함께 계신분이 있습니다
전향서를 앞에 놓고
협박과 공갈,유혹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에도
저에게 힘을 주신분이 있습니다
찾아오신듯 곁에 계신듯
죽음을 이기는 불사약을 주고
아픈 상처도 가셔주시며
신념의 대를
더욱 굳게 해주신분이 있습니다
아 그분은
빼앗긴 나라를 찾아주시고
불우한 식민지청년 나에게
인간다운 삶과
생활의 아름다운 노래를 주신
만고의 영웅 김일성장군
강영관동지는 2003년 4월에 공판을 앞두고 면회하러 간 변호사에게 절절하게 말했다.
《나는 무죄다. 내가 무너지면 총련중앙이 위태로워진다. 조선전쟁시기로 말하면 나는 1211고지에 서있는 심정이다. 무죄를 쟁취하자면 일본법률을 알아야 하니 책을 구해달라.》
빌린 법률책들을 다 옮겨써놓고 돌린 후에 계속 되새기던 편지지는 《형법》 1조로부터 263조까지 56장, 《형사소송법》 1조로부터 204조까지 46장, 《민법》 1조로부터 1,043조까지 146장.
이 피타는 노력이 있어 그는 법정에서 《이런 재판은 정치재판, 사법의 독립성을 상실한 부당재판이고 총련탄압을 노린 폭거이다!》고 고발하고 자기의 무죄를 법적으로 론증하였던것이다.
량심과 의리, 사랑과 자기희생
강영관동지는 몸은 감방에 있었으나 마음은 언제나 총련대오에 서있었다.
《보내준 〈조선신보〉를 오늘 고맙게 받았습니다.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염천하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것 같이 생명수가 오장륙부에 스며드는것처럼 탐독하였습니다.…새해를 맞이하면 이제는 총련 제21차 전체대회입니다. 올해를 긍지높이 마무리한다고 확신합니다.》(12월 4일편지)
《…우리 나라의 자위적대미억제력강화의 자주적인 조치를 계기로 일본정부의 반공화국, 반총련책동은 광란지경에 이르고있습니다. 험악한 정세와 환경, 가지가지의 악조건에도 굴함없이 경애하는 장군님의 선군령도따라 전진하는 여러분들의 투쟁모습은 저에게 한없는 고무적힘을 주고있습니다.》